중독 치유 길라잡이

제11회 알코올중독자는 아무도 못말려 Ⅱ - 마시려는 자와 끊어주려는 자

관리자
2024-07-25
조회수 316

 

환자가 최우선으로 여기는 것은 퇴원이다. 그들은 말한다. 퇴원이 장땡이라고, 퇴원이 먼저고, 치료는 뒷전이다. 왜 그럴까? 알코올중독자들은 술에 취해 정상적인 사회인들의 생활 규범에서 벗어난 제멋대로의 생활이 습관화된 사람들이다. 오죽하면 알코올중독자가 규정된 시간에 밤만 먹을 수 있어도 회복으로 간주할까? 그런 생활에 익숙한 그들은 자유를 속박당하는 것이 싫고, 또 자신들은 인식하지 못하나 그 주된 이유는 밖으로 나가야(퇴원하면 마실 자유가 주어지니까) 술을 마실 수 있으니까.

이런 환자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 치료에 협력하게 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에게 알코올중독자는 기피 대상이 된다. 치료를 거부하고 진단조차 방해하는 환자 치료에 스트레스를 받기 싫고, 또 의사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아무리 능력 있는 의사라 할지라도 평생에 알코올중독자 한 명의 치료도 어렵다고 한다.

알코올중독은 치명적인 질병임에도 환자들은 왜 그럴까? 그들은 살기 싫은 것일까?

중독자는 사고(思考) 또는 지성의 수준에서는 중독자도 물질이 정서적 충족을 가져올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알코올중독자라면 아마도 “당신은 술병 속으로 도망칠 수 없다”라는 격언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알코올중독자는 “인생에는 일 말고도 많은 것들이 있다”라는 사실을 안다. 쇼핑중독자도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라는 것을 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중독의 늪에 빠져들까?

중독이라는 질환은 인간의 아주 깊은 내면에서 시작된다. 그 사람의 고통은 정서적 수준에서 일어난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친밀함은 논리적으로 평가되지 않은 정서적 체험이다.

살아가면서 어떤 사람은 이유 없이 싫고, 또 어떤 사람은 나에게 잘해주는 것도 없는데 역시 이유 없이 호감을 갖는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것인가?

중독은 중독자가 친밀함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물질이나 행동과 맺는 정서적인 관계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중독의 논리가 분명해진다. 음식에 강박적으로 중독된 사람은 슬픔을 느낄 때, 기분이 좋아지기 위해 먹는다. 알코올중독자는 분노를 통제할 수 없다고 느끼기 시작하면 통제력을 되찾기 위해 술을 마신다.

중독은 논리적 진행 과정을 따르나, 이러한 진행은 지적인 논리가 아니라 정서적 논리라 부르는 논리에 전적으로 근거하고 있다. 지적인 논리에 근거해서 중독을 이해하려는 사람은 좌절감을 느끼고 중독자에게 조종당한다고 느낄 것이다. 그래서 지원해 주는 집단 없이 상담사 단독으로 중독자에게 파괴적인 중독 관계를 끝내라고 설득하는 대화 요법이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치료자는 이런 어려움을 호소한다. “당신들은 우리만큼 술 마셔봤어? 마시고 갇혀봤어? 우리처럼 금단해 봤어? 그런 것 하나도 못 해본 당신들이 어떻게 우리 마음을 알고 우리를 치료한다고 주장해?” 알코올중독자는 치료자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이렇게 주장한다. 이런 주장에 치료자는 할 말을 잃는다고 한다.

그래서 알코올중독에서 회복된 알코올중독자가 가장 훌륭한 치료자라고 한다. 그러나 알코올중독에 조예가 깊은 의사들은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당신들은 우리에게 치료할 기회 한번 줘봤어? 당신들은 치료는 거부하고 진단마저 방해했잖아.”

정서적 논리는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하며, 지금 당장 그것을 원한다”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정서적 욕구는 종종 아주 긴급하고 강박적으로 느껴진다. 정서적 논리는 비록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당사자에게 가장 유익한 일은 아닐지라도 이런 급박함을 해소하기 위하여 작용한다.

병원에 알코올중독자의 입원 치료를 의뢰한다. 대개 입원은 알코올중독자가 술에 만취된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술에서 깨어있을 때 입원이 이루어지면 환자가 강력하게 저항하고, 또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연락이 와야 구급차를 출동시킬 텐데 기다려도 연락이 없다. 기다리다 못한 병원에서 전화한다. 조금만 기다리라고 한다. 곧 마실 것이라고 한다.

환자가 외출하고 귀가했다. 평소 술이라면 칠색 팔색이던 아내가 오늘따라 웬일인지 거실 탁자에 술상을 차려놓고 있다. 바보가 아닌 알코올중독자는 생각한다. 그리고 경계한다. 이건 음모다. 무슨 꿍꿍이가 있다고 의심하면서 알코올중독자는 선득 마시지 않는다. 본능적으로 경계한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뿐이다. 다시 병원에서 전화가 온다. 아내는 말한다. “술상 주위를 뱅뱅 도내요. 지가 안 마시고 배겨요. 곧 마실 것이니 잠시 후 차를 보내세요.” 알코올중독자는 아내의 장담대로 잠시 후 술을 마시고 병원에 끌려간다. 그리고 술이 깬 환자는 말한다. 함정에 빠졌다고, 억울하고, 분하다고, 그래서 퇴원하면 가만 안 두겠다고 보복을 다짐한다.

이런 현상이 이성적 논리를 능가하는 정서적 논리를 잘 설명하고 있다.

정서적 논리는 중독자에게 자신과 싸우게 만든다. 빅 북에서 “우리는 교활하고 혼란스러우며 강력한 알코올과 대적하고 사실을 기억하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 ‘교활하고 혼란스러우며 강력하다’라는 표현은 모든 중독자들의 정서적 논리를 묘사하는 가장 진실한 표현이다.

그렇다면 왜 중독자들은 술을 버리지 못하고 병적으로 집착할까?

또 병적이란 무엇인가? 건강하거나 정상적인 상태에서 벗어났을 때 병적이라 부른다. 우리는 누군가가 정상적인 상태에서 벗어났을 때 병적이란 말을 쓴다. 그러므로 병적이란 비정상을 뜻한다. 따라서 중독은 물질이나 행동과 맺는 비정상적인 관계다.

모든 물질은 정상적이고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기능을 한다. 음식은 영양을 공급하고, 도박과 게임은 즐거움과 흥분을 제공하고, 약물은 고통을 진정시키거나 질병의 극복을 도와준다. 물질은 이와 같은 용도로 사용하는 사람은 그것과 정상적이고 건강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중독자는 어떤 물질이 지니는 정상적이고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기능에서 벗어나 물질과 병적 또는 비정상적인 관계를 맺는다. 음식, 도박, 약물은 새로운 기능을 하게 된다. 즉, 중독자는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기를 바라는 의도에서 행동이나 물질과 관계를 맺는다.

다른 사람, 공동체, 더 높은 존재인 신과 두루 친밀한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이 정상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중독자가 이런 건강한 관계 대신 자신의 욕구 충족의 용도로 물질이나 행동과 맺는 관계는 병적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대상에 병적인 집착이 시작된다. 우리가 물질이나 행동과 맺는 관계는 종종 <편의에 따라 맺는 관계>, 즉 우리가 삶을 더 쉽고 편안하게 만들기 위해 우리의 편의에 따라 물질을 이용한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음식, 쇼핑, 술과 같이 중독자들이 중독되는 물질이나 행동과도 단순히 편의에 따라 관계를 맺는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런 관계를 맺으면서 대상과 정서적 유대를 느끼거나 친밀하다고 착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독자는 이러한 관계를 통해 자신의 정서적이고 친밀한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노력하면서 물질이나 행동이 그 사람에게 점점 더 중요해진다. 결국 그것은 중독자에게 가장 중요한 정서적 관계로 자리를 잡는다.

그래서 그들은 생활에서도 중독 충족, 욕구 충족이 최우선이 된다. 가족과의 외식 약속도 술자리 모임이 들어오면 당연히 뒤로 밀린다. 모처럼의 외식에 들떠있던 아내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불같이 화를 내는 아내에게 합리화란 무기를 조자룡 헌창 쓰듯 사용한다.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초등학교 동창이잖아. 우리 외식이야 언제든 다시 날 잡으면 되잖아?” 이런 식으로 모든 중대사는 그들 욕구 충족에 밀린다. 이런 현상이 알코올중독자들의 자기중심적 사고다.

그들은 기분 변화를 체험하기 때문에 자신의 정서적인 욕구가 충족되었다고 믿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다.

사람이 정서적 안정을 위해 물질이나 행동을 찾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그때부터 그 대상과 중독 관계를 형성하는 기초를 쌓는 것이다. 약물의존 분야에서 발달한 중독의 정의를 ‘그레이크 네켄’은 “중독은 물질이나 행동을 대상으로 애정과 신뢰를 쏟는 병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래서인가? 결혼 전 함진아비까지 해 준 친구가 있었다. 15년 만에 연락이 되어 만남이 이루어졌다. 천하의 술꾼을 자부하는 그에게 술을 권하고 나는 그가 권하는 술을 거절했다. ”니가 안 마시니 내가 섭섭하다.” 하며 혼자 술잔을 홀짝였다. 그리고 3일 후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다시 한번 그런 일이 있고 그 친구는 나와의 관계를 끊었다.

애주가와 애연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술과 담배에 부정적인 사람들을 싫어한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들의 욕구 충족에 방해가 된다고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즉, 좋아하는 대상에 쏟는 애정과 신뢰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닐까?

이런 집착이 술과의 전쟁으로 진화한다. 술을 숨기려는 알코올중독자와 숨긴 술을 찾으려는 가족과의 치열한 전쟁이 벌어진다. 중독자는 감시의 눈을 피해 술을 마셔야 하기 때문에 곳곳에 술을 숨겨놓는다. 이렇게 숨긴 술을 아내들은 기를 쓰고 찾아낸다. 혼자 힘으로 안 되면 아이들까지 동원한다. 아빠가 숨긴 술 한 병 찾으면 돈 500원 하고 현상금까지 건다.

중독자는 집안 곳곳에 술을 숨긴다. 옷장, 장롱 이부자리 틈새, 화장실 등 이 구석 저 구석에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여성 환자들이 선호하는 곳은 쌀독이다. 심할 때는 자신이 숨긴 술을 찾지 못하는 일도 있다. 알코올중독자가 입원하고 집을 떠나면 대청소가 시작된다. 술과 담배 냄새로 찌든 방 이 구석 저 구석을 치우고 쓸고 닦는다. 그럴 때 집안 곳곳에서 술병이 발견된다. 겨울옷 주머니에서, 이불 속에서, 침대 밑에서. 신발장 장화 속에서도 빈 술병이며 마시다 만 술병, 뚜껑이 열지도 않은 새 술병도 발견된다.


어느 집 남편은 집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는데 취해 있다. 아무리 찾아도 술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외출하는 척 위장하고 옆집의 동의를 얻어 그 집 옥상에서 남편의 동태를 감시했다. 어슬렁어슬렁 실내복 차림으로 현관 밖으로 나오는 남편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남편을 주저하지 않고 담장 밑 화단 경계석으로 다가가 꼽아둔 병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병뚜껑을 따고 벌컥벌컥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닌가. 벽돌 대신 경계석으로 꼽아둔 병들이 빈 병이 아니라 술이 가득 찬 새 술병이었다.


또 다른 예, 이번 알코올중독자도 외출하지 않는데도 술에 취해 있었다, 집안을 철저히 수색했으나 술은 발견되지 않았다. 밖으로 나간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취해 있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아내는 이웃의 양해를 얻어 그 집 옥상에 숨어 남편의 동태를 감시했다. 아내의 외출을 확인한 남편은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주저함이 없이 간장독의 뚜껑을 열고 소매를 걷고 손을 쑥 집어넣었다. 그리고 손을 뽑자, 그 손에는 술병이 들려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런 술에 대한 집착을 제거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