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코올중독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은 중독을 도덕적 결점, 의지력 부족, 또는 세상을 대면할 능력의 부족, 신체적 결함, 영적인 질환 등 여러 가지로 설명해 왔다.
거의 모든 인간은 마음과 영혼의 평화를 얻고 행복을 누리고 싶어 하는 깊은 갈망을 지니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온전하게 평화와 아름다움을 체험한다. 그러나 그 순간은 곧 사라지며,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돌아올 때도 있고, 그러하지 아니할 때도 있다.
그렇게 행복의 순간이 사라지면 우리는 허전해하거나, 상실감을 느끼거나, 더 심할 경우 슬픔을 느끼고 아파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삶의 자연스러운 순환이며, 그것은 우리의 통제밖에 있다. 이것이 인생의 기복이며, 이런 기복 없이 행복이면 행복만, 불행이면 불행만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행복과 평화를 찾았다가 잃어버리는 순환을 어느 정도까지는 조절할 수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 순환은 대개 우리 소관 밖에서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누구나 어쩔 수 없이 기복을 겪어야 한다. 그래서 소위 팔자타령을 한다. 우리는 이러한 순환을 받아들이고 그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도 있지만 잡히지 않는 행복을 추구하면서 그에 대항하여 싸울 수도 있다.
이렇게 인력으로 어쩔 수 없이 변화되는 행복감을 통제하려는 시도를 중독이라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명심할 것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행복과 평화를 중독자는 쾌감과 쾌의 상태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중독자는 어떤 물질이나 행동이 기분을 조절해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상태로 기분을 바꾸고 싶어서 그러한 것들에 의존하게 된다.
사실 처음에는 그 방법이 효과가 있을 수도 있다. 중독은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보면 행복에 대한 갈망을 충족시키려는 노력이다.
모든 중독에는 어떤 물질이나 행동과 관계를 맺으면서 온전함, 행복, 평화를 무작정 추구하는 특성이 있다. 중독의 종류가 무엇이든 모든 중독자는 원하는 기분의 변화, 취한 상태 또는 황홀감을 이끌어내기 위해 어떤 물질이나 행동과 관계를 맺는다. 이것이 중독이다.
알코올중독자들이 추구하는 황홀감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자.
만취 또는 명정 상태(酩酊 ; 정신을 차리지 못할 상태로 술에 취함)는 알코올중독의 경우 음주를 실행하면서 도취되는 상태, 즉 황홀감 엑스터시(Ecstasy ; 일상적인 의식 수준이 저하되면서 빠져드는 황홀 상태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샤머니즘을 비롯한 여러 종교에서 신비 체험의 최고 상태를 가리킨다)에 빠지는 상태로 본다.
황홀한 상태는 주변의 물리적 환경으로부터 분리된 일종의 이탈 상태다. 황홀한 상태에 들어간 사람은 대개 다른 사람의 의심을 받지 않고(방어기제를 사용하여) 중독된 세계와 실제 세계 사이를 떠다니면서 두 세계에 동시에 살 수 있다.
황홀감은 고통, 죄책감, 수치심으로부터 중독자를 분리해 주기 때문에 무척 매혹적이다. 중독자는 황홀 상태에서 지내고, 고통스러운 감정을 은폐하기 위해 그 상태를 이용하는 데 점점 더 능란해진다. 그 과정에서 중독자는 자신이 힘이 있고, 상황을 장악한다는 느낌을 얻지만, 한편으로는 황홀감에 의존하게 되는데, 이러한 의존을 거치면서 중독 과정은 진전된다.
우리는 영적인 원리와 연결되고, 그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초월을 갈망하기 때문에 이렇게 황홀감에 이끌리는 것이다. 우리는 신과 연결되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황홀감은 가상 현실을 만들어 내 그 안에서 영적인 체험을 실제로 일어난 것처럼 착각하게 해 줄 뿐이다.
진정한 영적 체험은 우리에게 더 깊은 의미를 깨닫게 해 주며, 치유되고 공감하면서 거듭 의미에 연결될 수 있게 해 준다. 그러한 체험은 관계와 인간성을 더욱 굳건히 믿게 해 준다,
그러나 중독성 황홀감을 통해 사이비 영적 체험을 한 사람들은 그 체험이 지나간 후에 애초에 자기가 피하려 했던 고통과 불안 상태로 다시 돌아온다. 알코올중독자의 경우 술로 얻은 황홀감을 통해 사이비 영적 체험을 한다. 이것이 술로 인한 명정 상태요, 엑스터시 상태다.
중독자는 이와 같은 황홀감을 술에서 찾는다. 술을 마시면 뇌 내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이 분출된다.
도파민(Dopanine)은 중추신경계에 존재하는 신경전달물질로 중뇌의 흙질과 복측피개야 영역의 도파민 신경세포에서 분비되어 의욕, 행복, 기억, 인지, 운동 조절 등 뇌에 다방면으로 관여한다.
도파민은 인간을 흥분시켜 인간이 살아갈 의욕과 흥미를 부여하는 신경전달물질 중 하나다. 도파민은 이러한 의욕을 샘솟게 해 주는 신경전달물질이기 때문에 분비되면 될수록 쾌락을 느끼며, 두뇌 활동이 증가하며, 학습 속도, 정확도, 인내, 끈기, 작업 속도 등에 영향을 준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도파민이 과도하게 분비되면 문제가 발생한다. 술을 마시거나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교회 등에서 뜨겁게 기도할 때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을 돕기 위해 신앙심을 고취하는 곡을 연주하면서 강력한 어조로 기도를 인도하는데, 사실 이런 것들이 도파민 분비를 적절히 촉진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 쉽게 기도에 몰입하게 된다.
반면에 종교인이 술을 마신 후에 종교활동을 하면 잠시 동안 성령 충만한 기분을 낼 수 있으나 다음날은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을 수 있다. 교회 등에서 음악을 연주하며 통성기도를 하는 것은 꼭 나쁜 것이라 할 수 없으나 인위적인 종교적 자극을 추구하게 되면 거기에 중독되어 고요하고 침착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선을 넘어 점점 자극적인 것을 찾다가 선을 넘어 다른 사람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하는 광신도가 될 수 있다. 우리가 가끔 보는 종교중독자의 모습에서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술을 마시면 도파민이 과도하게 분출된다. 그러면 기분이 평소에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극도의 쾌의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마시면 도파민이 분비되고, 도파민이 분비되면 기분이 좋아지고,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철저한 학습이 이루어진다.
자전거를 한번 배우면 영원히 잊지 않고 자전거를 탈 수 있는 것과 같이 우리의 뇌는 이런 학습을 결코 잊지 않는다. 그래서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고 과음한 다음 날 술의 역기능으로 숙취의 괴로움이 필연적으로 따라오고, 이 괴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다시 술을 마셔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도파민을 계속 만들어 사용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초기에는 분비된 도파민을 재활용하기 위해 흡수해 간다. 그 흡수량은 약 70% 정도가 된다. 상습적 음주가 계속되면 나중에는 흡수량이 30% 정도로 감소된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직 덜 마셔서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 것으로 오인하고 기분이 좋아질 때까지 술을 마신다. 그렇게 과음한 다음 날 아침이면 숙취의 고통 때문에 해장술을 마셔야 하고, 그 해장술이 발동이 걸려 다시 과음하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것이 중독자가 기분 좋은 상태 즉, 쾌의 상태를 추구하는 잘못된 행동이다. 약물이나 알코올에 의한 인위적 쾌의 상태. 황홀감은 곧 사라지고 그 역기능의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우리는 영적 원리와 연결되고, 그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 자연스럽게 초월을 갈망하기 때문에 황홀감에 이끌리는 데, 인위적인 약물이나 알코올로 유발된 황홀감은 잠시뿐이다.
문제는 그뿐만 아니라 진정한 연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영혼의 공허함까지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중독자가 황홀 상태를 추구한다는 사실은 중독이 영적 질환이라는 정의를 일부 설명해 준다.
중독은 일시적인 느낌만을 만들어 낼 뿐인 물질이나 행동이 자신을 영적으로 연결시켜 줄 것이라고 믿고 추구하는 질환이다. 그런 방식으로 신의 존재와 연결되려는 지속적이고 헛된 노력은 절망, 두려움, 비통함을 낳으며, 이러한 것들은 중독자를 영성과 인간성으로부터 더욱 소외시킨다.
중독자들이 추구하는 잘못된 황홀감 추구, 잘못된 방식의 신과의 연결에 새 방향을 제시하고 치유가 불가능한 질병으로 간주하던 알코올중독 치료의 가능성을 열어준 사람이 A.A.의 창시자 빌 윌슨이었다.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1934년 11월 빌 윌슨이 여전히 술을 마시고 있었고, 병원에 입·퇴원을 반복하고 있을 때, 옥스퍼드 그룹을 통해 술 끊는 것에 성공한 오랜 친구 에비 대처(Ebby Thacher)가 옥스퍼드 그룹의 원칙을 설명했다.
옥스퍼드 그룹이란 1930년 네덜란드계 루터교 목사인 프랭크 부처만(Frank Buchman)이 설립했다. 알코올중독 치료의 어려움에 해결책을 찾고자 기독교의 성경적 원리를 치료 프로그램에 도입한 것이 옥스퍼드 그룹이었다. 이것이 A,A,의 시초가 되었고, 12단계 회복 과정의 근거가 되었다.
이 장면을 빌은 빅 북의 ‘빌의 이야기’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공연히 슬프던 11월 말경, 나는 우리 집 부엌에 앉아서 마시고 있었다. 그날 밤과 다음 날 하루를 지탱할 수 있을 만큼의 술이 집안 여기저기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내고는 꽤 만족스러웠다. 아내는 일하러 나갔다. 나는 침대 머리 가까이에 독주 한 병을 감추어 놓을까 어쩔까 망설이고 있었다. 새벽이 되기 전에 그것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나의 망설임은 전화벨 소리에 의해 중단되었다. 옛 동창생이 활기찬 목소리로 “가도 좋으냐”고 물어왔다. 그는 취하지 않았다. 내 기억으로 그가 그런 맑은 상태로 뉴욕에 온 것은 몇 년만의 일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가 알코올중독에 의한 정신이상으로 입원해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도망쳐 나왔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저녁 식사는 같이하게 되겠지. 그때 마음 놓고 마셔야겠다. 나는 그의 변한 모습은 상상하지도 못하고, 지난날의 기분을 되찾을 생각만 하고 있었다. 한때는 술잔치를 위해 비행기를 대절한 적도 있었다.
그가 여기에 오는 것은 재미없고 건조한 사막에 오아시스 같은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오아시스가 되는 것이다. 술꾼이란 다 그런 것이다.
문이 열리고 혈색이 좋고, 빛나는 모습으로 그가 서 있었다. 그의 눈은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었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변해 있었다. 대체 무엇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나는 식탁 위에 술을 내놓았다. 그는 그것을 거절했다. 실망한 가운데에도 이 친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그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이, 대관절 어떻게 된 거야?” 그는 똑바로 나를 보고 미소를 띤 채 간단히 말했다. “나는 믿음을 갖게 된 거야.”
나는 깜짝 놀랐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작년 여름만 해도 정신이상인 알코올중독자였는데. 이번에는 종교에 조금 미쳐버린 것이겠지’라고 생각했다.
-중략 -
그러나 그는 떠들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신사가 법정에 나타나서 판사에게 자기의 형량을 감해 줄 그것을 호소했다고 담담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 사람들은 단순한 종교적인 생각을 실제적인 행동으로 옮기는 프로그램을 말해주었다. 그것이 2개월 전의 일로 지금 보는 것과 같이 효과가 있었다는 것이다. (주 ; 이것이 치료 명령제의 시작이다. 취중 범죄나 마약 사범을 단순히 교도소에 격리하여 처벌만 한다고 그들이 반성하여 재발하지 않을까? 어떤 알코올중독자는 취중 필름이 끊긴 상태에서 아내를 목 졸라 살해했다 5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그는 다시 술을 마시고 5년 전의 알코올중독자로 다시 돌아갔다. 그런 폐단을 막기 위해 근래 미국에서는 치료 명령제를 도입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런 치료명령제의 도입이 시급하다.)
그는 확실히 나의 흥미를 자극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했다. 나는 절망하고 있었으니까. 그때까지 빌은 종교에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친구는 내 앞에 앉아서 그가 자기를 위해 할 수 없었던 일을 신이 그를 위해 해 주었다고 딱 잘라 말하는 것이었다.
그의 인간적 의지는 실패할 뿐이었으며, 의사들은 가망이 없다고 말했고, 사회는 그를 가두어 두려고 했다. 지금의 나와 같은 처지로. 그는 완전히 실패를 인정해야만 했다. 그 다음에 그는 정말로 죽음으로부터 되살아났다. 돌연 쓰레기 더미에서 이전에 그가 경험했던 최고의 상태보다 더 훌륭한 수준으로 끌려 올려진 것이다.
이러한 힘이 그의 안에서 생겨났을까? 분명히 그렇지는 않았다. 그 당시 그에게는 내 안에 있는 힘 이상의 힘은 없었다. 결국 아무 힘도 없었다는 말이다.
이 일은 나를 압도했다. 결국 신심이 깊었던 사람들이 옳았던 것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무엇인가가 있어서 불가능한 일을 해낸 것이다. 기적에 관한 생각이 철저히 변한 것이 바로 이때였다. 곰팡내 나는 과거는 마음에 둘 필요가 없었다. 식탁을 사이에 두고 눈앞에 기적이 앉아 있는 것이다. 그는 위대한 기적을 가져온 것이다.
-중략-
마지막으로 병원에서 알코올로부터 격리되었다. 그것은 현명한 치료법이었다. 내가 정신착란의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거기서 나는 내가 이해하게 된 대로의 신께 당신의 뜻대로 나에게 해 주시기를 바라며, 겸손히 나 자신을 바쳤다.
(여기서 겸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겸손의 의미를 살펴보자.)
쟝 칼뱅의 <기독교강요>에서의 겸손
하나님이 입혀주시는 옷을 입기 위해서는
우리의 장점이 전혀 없는 벌거숭이임을 인정해야 하고,
그에게 채움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이 전혀 없음을 인정하고,
그로 말미암아 조명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는 소경임을 인정하고,
그의 도우심을 얻기 위해 우리의 약점을 인정하고,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며,
우리는 그 안에서 영광을 얻도록 우리 자신에 영광 돌릴 가치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쟝 칼뱅 아무 것도 아닌 존재다. 나의 힘으로는 살 수조차 없다. 도움이 필요하다. 그런데 나를 살릴 수 있는 힘은 이 세상에는 없다. 인간이 아닌 하나님만이 나를 도와 살릴 수 있다.
이런 겸손에 이르기는 너무나도 어렵다. 인간의 자존심과 자만심이 이를 저해한다. 그리하여 아프리카의 성자로 불리우는 앤드류 머레이는 겸손을 위한 기도문을 만들었다.
겸손을 위한 기도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의 크신 은혜를 좇아서 저로 하여금 제 안에 있는 교만을 깨닫게 하옵시고,
또 제하여 버리게 하옵소서,
그것이 어떤 종류이건 아무리 적은 것이건 어느 정도이건 간에 또 그것이 악한 영의 역사이건, 혹은 제 본성의 소산이건 간에
그것을 깨닫고 제하여 버리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제가 하나님의 빛과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자가 되기 위하여
지극히 깊은 겸손의 비밀을 체득하게 하여 주소서.
말기암 환자는 살기 위해 치료자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밖에 없다. 그는 살기 위해 치료자가 하라고 권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한다. 전 재산을 내놓으라고 해도, 다리를 절단하라고 해도 순종한다. 왜? 살기 위해.
알코올중독이란 병을 배우고 깨달으면 살기 위해 술을 끊어야 살 수 있고, 그것이 인간의 도움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체득한 중독자는 이와 같은 겸손에 도달한다. 그래서 A,A,에서는 겸손을 무한 강조한다.
인생의 막바지까지 몰린 빌은 이런 겸손의 심경에 이른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전적으로 그의 보호와 지시에 나 자신을 맡겼다. 나는 처음으로 내가 정말 아무것도 아니며, 신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가차 없이 나의 죄와 대면했고, 새로운 친구인 신에게 나의 죄를 뿌리째 뽑아버려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 이후 마시지 않고 있다.
- 이 장면을 이렇게 기록한다.-
20년 후 일원들은 그날 밤의 회심을 이렇게 묵시했습니다. “나의 우울함은 참을 수 없을 만큼 깊어졌고, 마침내 바닥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나의 완고한 교만함의 마지막 흔적이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갑자기 나는 자신이 울부짖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정말 존재한다면 당신 자신을 보여주세요, 나는 어떤 일이라도 정말 어떤 일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갑자기 방안에 아주 밝은 빛으로 환해졌습니다.
나는 황홀경에 빠졌고, 그것을 묘사할 말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나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의 느낌이 강하게 남아 있었고, 나는 생각하기를 ‘그래 이것이 하나님의 설교구나!’라고 했습니다. 엄청난 평화가 엄습해 왔습니다.
술을 마시고 얻는 일시적인 황홀감과 빌이 얻은 황홀감의 차이를 이런 기록으로 우리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알코올중독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은 중독을 도덕적 결점, 의지력 부족, 또는 세상을 대면할 능력의 부족, 신체적 결함, 영적인 질환 등 여러 가지로 설명해 왔다.
거의 모든 인간은 마음과 영혼의 평화를 얻고 행복을 누리고 싶어 하는 깊은 갈망을 지니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온전하게 평화와 아름다움을 체험한다. 그러나 그 순간은 곧 사라지며,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돌아올 때도 있고, 그러하지 아니할 때도 있다.
그렇게 행복의 순간이 사라지면 우리는 허전해하거나, 상실감을 느끼거나, 더 심할 경우 슬픔을 느끼고 아파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삶의 자연스러운 순환이며, 그것은 우리의 통제밖에 있다. 이것이 인생의 기복이며, 이런 기복 없이 행복이면 행복만, 불행이면 불행만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행복과 평화를 찾았다가 잃어버리는 순환을 어느 정도까지는 조절할 수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 순환은 대개 우리 소관 밖에서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누구나 어쩔 수 없이 기복을 겪어야 한다. 그래서 소위 팔자타령을 한다. 우리는 이러한 순환을 받아들이고 그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도 있지만 잡히지 않는 행복을 추구하면서 그에 대항하여 싸울 수도 있다.
이렇게 인력으로 어쩔 수 없이 변화되는 행복감을 통제하려는 시도를 중독이라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명심할 것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행복과 평화를 중독자는 쾌감과 쾌의 상태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중독자는 어떤 물질이나 행동이 기분을 조절해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상태로 기분을 바꾸고 싶어서 그러한 것들에 의존하게 된다.
사실 처음에는 그 방법이 효과가 있을 수도 있다. 중독은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보면 행복에 대한 갈망을 충족시키려는 노력이다.
모든 중독에는 어떤 물질이나 행동과 관계를 맺으면서 온전함, 행복, 평화를 무작정 추구하는 특성이 있다. 중독의 종류가 무엇이든 모든 중독자는 원하는 기분의 변화, 취한 상태 또는 황홀감을 이끌어내기 위해 어떤 물질이나 행동과 관계를 맺는다. 이것이 중독이다.
알코올중독자들이 추구하는 황홀감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자.
만취 또는 명정 상태(酩酊 ; 정신을 차리지 못할 상태로 술에 취함)는 알코올중독의 경우 음주를 실행하면서 도취되는 상태, 즉 황홀감 엑스터시(Ecstasy ; 일상적인 의식 수준이 저하되면서 빠져드는 황홀 상태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샤머니즘을 비롯한 여러 종교에서 신비 체험의 최고 상태를 가리킨다)에 빠지는 상태로 본다.
황홀한 상태는 주변의 물리적 환경으로부터 분리된 일종의 이탈 상태다. 황홀한 상태에 들어간 사람은 대개 다른 사람의 의심을 받지 않고(방어기제를 사용하여) 중독된 세계와 실제 세계 사이를 떠다니면서 두 세계에 동시에 살 수 있다.
황홀감은 고통, 죄책감, 수치심으로부터 중독자를 분리해 주기 때문에 무척 매혹적이다. 중독자는 황홀 상태에서 지내고, 고통스러운 감정을 은폐하기 위해 그 상태를 이용하는 데 점점 더 능란해진다. 그 과정에서 중독자는 자신이 힘이 있고, 상황을 장악한다는 느낌을 얻지만, 한편으로는 황홀감에 의존하게 되는데, 이러한 의존을 거치면서 중독 과정은 진전된다.
우리는 영적인 원리와 연결되고, 그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초월을 갈망하기 때문에 이렇게 황홀감에 이끌리는 것이다. 우리는 신과 연결되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황홀감은 가상 현실을 만들어 내 그 안에서 영적인 체험을 실제로 일어난 것처럼 착각하게 해 줄 뿐이다.
진정한 영적 체험은 우리에게 더 깊은 의미를 깨닫게 해 주며, 치유되고 공감하면서 거듭 의미에 연결될 수 있게 해 준다. 그러한 체험은 관계와 인간성을 더욱 굳건히 믿게 해 준다,
그러나 중독성 황홀감을 통해 사이비 영적 체험을 한 사람들은 그 체험이 지나간 후에 애초에 자기가 피하려 했던 고통과 불안 상태로 다시 돌아온다. 알코올중독자의 경우 술로 얻은 황홀감을 통해 사이비 영적 체험을 한다. 이것이 술로 인한 명정 상태요, 엑스터시 상태다.
중독자는 이와 같은 황홀감을 술에서 찾는다. 술을 마시면 뇌 내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이 분출된다.
도파민(Dopanine)은 중추신경계에 존재하는 신경전달물질로 중뇌의 흙질과 복측피개야 영역의 도파민 신경세포에서 분비되어 의욕, 행복, 기억, 인지, 운동 조절 등 뇌에 다방면으로 관여한다.
도파민은 인간을 흥분시켜 인간이 살아갈 의욕과 흥미를 부여하는 신경전달물질 중 하나다. 도파민은 이러한 의욕을 샘솟게 해 주는 신경전달물질이기 때문에 분비되면 될수록 쾌락을 느끼며, 두뇌 활동이 증가하며, 학습 속도, 정확도, 인내, 끈기, 작업 속도 등에 영향을 준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도파민이 과도하게 분비되면 문제가 발생한다. 술을 마시거나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교회 등에서 뜨겁게 기도할 때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을 돕기 위해 신앙심을 고취하는 곡을 연주하면서 강력한 어조로 기도를 인도하는데, 사실 이런 것들이 도파민 분비를 적절히 촉진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 쉽게 기도에 몰입하게 된다.
반면에 종교인이 술을 마신 후에 종교활동을 하면 잠시 동안 성령 충만한 기분을 낼 수 있으나 다음날은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을 수 있다. 교회 등에서 음악을 연주하며 통성기도를 하는 것은 꼭 나쁜 것이라 할 수 없으나 인위적인 종교적 자극을 추구하게 되면 거기에 중독되어 고요하고 침착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선을 넘어 점점 자극적인 것을 찾다가 선을 넘어 다른 사람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하는 광신도가 될 수 있다. 우리가 가끔 보는 종교중독자의 모습에서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술을 마시면 도파민이 과도하게 분출된다. 그러면 기분이 평소에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극도의 쾌의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마시면 도파민이 분비되고, 도파민이 분비되면 기분이 좋아지고,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철저한 학습이 이루어진다.
자전거를 한번 배우면 영원히 잊지 않고 자전거를 탈 수 있는 것과 같이 우리의 뇌는 이런 학습을 결코 잊지 않는다. 그래서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고 과음한 다음 날 술의 역기능으로 숙취의 괴로움이 필연적으로 따라오고, 이 괴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다시 술을 마셔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도파민을 계속 만들어 사용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초기에는 분비된 도파민을 재활용하기 위해 흡수해 간다. 그 흡수량은 약 70% 정도가 된다. 상습적 음주가 계속되면 나중에는 흡수량이 30% 정도로 감소된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직 덜 마셔서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 것으로 오인하고 기분이 좋아질 때까지 술을 마신다. 그렇게 과음한 다음 날 아침이면 숙취의 고통 때문에 해장술을 마셔야 하고, 그 해장술이 발동이 걸려 다시 과음하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것이 중독자가 기분 좋은 상태 즉, 쾌의 상태를 추구하는 잘못된 행동이다. 약물이나 알코올에 의한 인위적 쾌의 상태. 황홀감은 곧 사라지고 그 역기능의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우리는 영적 원리와 연결되고, 그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 자연스럽게 초월을 갈망하기 때문에 황홀감에 이끌리는 데, 인위적인 약물이나 알코올로 유발된 황홀감은 잠시뿐이다.
문제는 그뿐만 아니라 진정한 연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영혼의 공허함까지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중독자가 황홀 상태를 추구한다는 사실은 중독이 영적 질환이라는 정의를 일부 설명해 준다.
중독은 일시적인 느낌만을 만들어 낼 뿐인 물질이나 행동이 자신을 영적으로 연결시켜 줄 것이라고 믿고 추구하는 질환이다. 그런 방식으로 신의 존재와 연결되려는 지속적이고 헛된 노력은 절망, 두려움, 비통함을 낳으며, 이러한 것들은 중독자를 영성과 인간성으로부터 더욱 소외시킨다.
중독자들이 추구하는 잘못된 황홀감 추구, 잘못된 방식의 신과의 연결에 새 방향을 제시하고 치유가 불가능한 질병으로 간주하던 알코올중독 치료의 가능성을 열어준 사람이 A.A.의 창시자 빌 윌슨이었다.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1934년 11월 빌 윌슨이 여전히 술을 마시고 있었고, 병원에 입·퇴원을 반복하고 있을 때, 옥스퍼드 그룹을 통해 술 끊는 것에 성공한 오랜 친구 에비 대처(Ebby Thacher)가 옥스퍼드 그룹의 원칙을 설명했다.
옥스퍼드 그룹이란 1930년 네덜란드계 루터교 목사인 프랭크 부처만(Frank Buchman)이 설립했다. 알코올중독 치료의 어려움에 해결책을 찾고자 기독교의 성경적 원리를 치료 프로그램에 도입한 것이 옥스퍼드 그룹이었다. 이것이 A,A,의 시초가 되었고, 12단계 회복 과정의 근거가 되었다.
이 장면을 빌은 빅 북의 ‘빌의 이야기’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공연히 슬프던 11월 말경, 나는 우리 집 부엌에 앉아서 마시고 있었다. 그날 밤과 다음 날 하루를 지탱할 수 있을 만큼의 술이 집안 여기저기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내고는 꽤 만족스러웠다. 아내는 일하러 나갔다. 나는 침대 머리 가까이에 독주 한 병을 감추어 놓을까 어쩔까 망설이고 있었다. 새벽이 되기 전에 그것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나의 망설임은 전화벨 소리에 의해 중단되었다. 옛 동창생이 활기찬 목소리로 “가도 좋으냐”고 물어왔다. 그는 취하지 않았다. 내 기억으로 그가 그런 맑은 상태로 뉴욕에 온 것은 몇 년만의 일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가 알코올중독에 의한 정신이상으로 입원해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도망쳐 나왔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저녁 식사는 같이하게 되겠지. 그때 마음 놓고 마셔야겠다. 나는 그의 변한 모습은 상상하지도 못하고, 지난날의 기분을 되찾을 생각만 하고 있었다. 한때는 술잔치를 위해 비행기를 대절한 적도 있었다.
그가 여기에 오는 것은 재미없고 건조한 사막에 오아시스 같은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오아시스가 되는 것이다. 술꾼이란 다 그런 것이다.
문이 열리고 혈색이 좋고, 빛나는 모습으로 그가 서 있었다. 그의 눈은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었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변해 있었다. 대체 무엇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나는 식탁 위에 술을 내놓았다. 그는 그것을 거절했다. 실망한 가운데에도 이 친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그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이, 대관절 어떻게 된 거야?” 그는 똑바로 나를 보고 미소를 띤 채 간단히 말했다. “나는 믿음을 갖게 된 거야.”
나는 깜짝 놀랐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작년 여름만 해도 정신이상인 알코올중독자였는데. 이번에는 종교에 조금 미쳐버린 것이겠지’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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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떠들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신사가 법정에 나타나서 판사에게 자기의 형량을 감해 줄 그것을 호소했다고 담담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 사람들은 단순한 종교적인 생각을 실제적인 행동으로 옮기는 프로그램을 말해주었다. 그것이 2개월 전의 일로 지금 보는 것과 같이 효과가 있었다는 것이다. (주 ; 이것이 치료 명령제의 시작이다. 취중 범죄나 마약 사범을 단순히 교도소에 격리하여 처벌만 한다고 그들이 반성하여 재발하지 않을까? 어떤 알코올중독자는 취중 필름이 끊긴 상태에서 아내를 목 졸라 살해했다 5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그는 다시 술을 마시고 5년 전의 알코올중독자로 다시 돌아갔다. 그런 폐단을 막기 위해 근래 미국에서는 치료 명령제를 도입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런 치료명령제의 도입이 시급하다.)
그는 확실히 나의 흥미를 자극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했다. 나는 절망하고 있었으니까. 그때까지 빌은 종교에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친구는 내 앞에 앉아서 그가 자기를 위해 할 수 없었던 일을 신이 그를 위해 해 주었다고 딱 잘라 말하는 것이었다.
그의 인간적 의지는 실패할 뿐이었으며, 의사들은 가망이 없다고 말했고, 사회는 그를 가두어 두려고 했다. 지금의 나와 같은 처지로. 그는 완전히 실패를 인정해야만 했다. 그 다음에 그는 정말로 죽음으로부터 되살아났다. 돌연 쓰레기 더미에서 이전에 그가 경험했던 최고의 상태보다 더 훌륭한 수준으로 끌려 올려진 것이다.
이러한 힘이 그의 안에서 생겨났을까? 분명히 그렇지는 않았다. 그 당시 그에게는 내 안에 있는 힘 이상의 힘은 없었다. 결국 아무 힘도 없었다는 말이다.
이 일은 나를 압도했다. 결국 신심이 깊었던 사람들이 옳았던 것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무엇인가가 있어서 불가능한 일을 해낸 것이다. 기적에 관한 생각이 철저히 변한 것이 바로 이때였다. 곰팡내 나는 과거는 마음에 둘 필요가 없었다. 식탁을 사이에 두고 눈앞에 기적이 앉아 있는 것이다. 그는 위대한 기적을 가져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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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병원에서 알코올로부터 격리되었다. 그것은 현명한 치료법이었다. 내가 정신착란의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거기서 나는 내가 이해하게 된 대로의 신께 당신의 뜻대로 나에게 해 주시기를 바라며, 겸손히 나 자신을 바쳤다.
(여기서 겸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겸손의 의미를 살펴보자.)
쟝 칼뱅의 <기독교강요>에서의 겸손
하나님이 입혀주시는 옷을 입기 위해서는
우리의 장점이 전혀 없는 벌거숭이임을 인정해야 하고,
그에게 채움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이 전혀 없음을 인정하고,
그로 말미암아 조명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는 소경임을 인정하고,
그의 도우심을 얻기 위해 우리의 약점을 인정하고,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며,
우리는 그 안에서 영광을 얻도록 우리 자신에 영광 돌릴 가치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쟝 칼뱅 아무 것도 아닌 존재다. 나의 힘으로는 살 수조차 없다. 도움이 필요하다. 그런데 나를 살릴 수 있는 힘은 이 세상에는 없다. 인간이 아닌 하나님만이 나를 도와 살릴 수 있다.
이런 겸손에 이르기는 너무나도 어렵다. 인간의 자존심과 자만심이 이를 저해한다. 그리하여 아프리카의 성자로 불리우는 앤드류 머레이는 겸손을 위한 기도문을 만들었다.
겸손을 위한 기도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의 크신 은혜를 좇아서 저로 하여금 제 안에 있는 교만을 깨닫게 하옵시고,
또 제하여 버리게 하옵소서,
그것이 어떤 종류이건 아무리 적은 것이건 어느 정도이건 간에 또 그것이 악한 영의 역사이건, 혹은 제 본성의 소산이건 간에
그것을 깨닫고 제하여 버리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제가 하나님의 빛과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자가 되기 위하여
지극히 깊은 겸손의 비밀을 체득하게 하여 주소서.
말기암 환자는 살기 위해 치료자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밖에 없다. 그는 살기 위해 치료자가 하라고 권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한다. 전 재산을 내놓으라고 해도, 다리를 절단하라고 해도 순종한다. 왜? 살기 위해.
알코올중독이란 병을 배우고 깨달으면 살기 위해 술을 끊어야 살 수 있고, 그것이 인간의 도움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체득한 중독자는 이와 같은 겸손에 도달한다. 그래서 A,A,에서는 겸손을 무한 강조한다.
인생의 막바지까지 몰린 빌은 이런 겸손의 심경에 이른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전적으로 그의 보호와 지시에 나 자신을 맡겼다. 나는 처음으로 내가 정말 아무것도 아니며, 신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가차 없이 나의 죄와 대면했고, 새로운 친구인 신에게 나의 죄를 뿌리째 뽑아버려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 이후 마시지 않고 있다.
- 이 장면을 이렇게 기록한다.-
20년 후 일원들은 그날 밤의 회심을 이렇게 묵시했습니다. “나의 우울함은 참을 수 없을 만큼 깊어졌고, 마침내 바닥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나의 완고한 교만함의 마지막 흔적이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갑자기 나는 자신이 울부짖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정말 존재한다면 당신 자신을 보여주세요, 나는 어떤 일이라도 정말 어떤 일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갑자기 방안에 아주 밝은 빛으로 환해졌습니다.
나는 황홀경에 빠졌고, 그것을 묘사할 말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나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의 느낌이 강하게 남아 있었고, 나는 생각하기를 ‘그래 이것이 하나님의 설교구나!’라고 했습니다. 엄청난 평화가 엄습해 왔습니다.
술을 마시고 얻는 일시적인 황홀감과 빌이 얻은 황홀감의 차이를 이런 기록으로 우리는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