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 치유 길라잡이

제6회 알코올병동 II

관리자
2024-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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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견디기 힘든 것이 폭력이었습니다. 저는 그 폭력의 대표적인 희생자였습니다.

이 병원의 시스템은 말로만 전해 듣는 감방의 그것과 같았습니다. 병실 전체를 총괄하는 총반장이 있고, 그 밑에 각 병실을 책임지는 방장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 병원에 의해 임명되었습니다. 그들의 권한은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들의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하고 불복하면 가혹한 징계가 뒤따랐습니다.

그들은 일과가 끝나면 프로그램실에 모여 하루 동안 관찰한 환자들의 상태를 병원 직원들에게 보고합니다. 보고받는 직원들은 사회복지사나 간호사가 아니라 환자 관리를 위한 보호사들이었습니다.

제가 배치받은 병실의 방장은 40대 후반의 역삼각형 얼굴에 뱀의 눈을 한 사내였습니다. 항상 독기를 품은 그의 얼굴과 마주치면 두려움에 숨이 턱턱 막혔습니다.

그는 병원에서 말하는 장기수였습니다. 장기수란 입원한 지 2~3년이 되어도 퇴원하지 못하고 면회도 없는 환자들을 지칭하는 말로, 그들은 병원보다는 차라리 형무소가 낫다고들 불평했습니다. 그들은 절대 권력을 가지고 환자들 위에 군림했습니다. 교도소는 형기가 있어 그날이 오면 사회로 돌아갈 수 있지만 이곳 정신병원의 퇴원을 보호자와 원장 마음대로였습니다. 평생을 정신병원에 갇혀 지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기약 없는 병원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인해 그들은 광폭해졌습니다.

면회 문제는 참으로 아이로니컬합니다. 면회할 때 퇴원을 종용 또는 협박할까 두려워 병원 직원이 면회를 감시했습니다. 면회할 때 보호자에게 협박성 말로 퇴원을 강요하면 그 환자는 그날부터 1주일간 벌 방에서 징계받습니다. 환자를 더 오래 잡아두기 위해서였습니다. 어떤 환자는 보호자에게 퇴원을 요구하고 스스로 벌방으로 들어가 징계를 자청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병원에 면회 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병원에서 치료받는 환자에게 문병을 하지 면회를 하지 않습니다, 죄를 짓고 수형을 위해 교도소에 갇힌 범죄자는 문병이 아닌 면회를 하러 갑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알코올중독자는 환자가 아닌 범죄자 취급을 은연중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정신보건복지법이 개정되어 환자 본인이 원하지 않는 한 3개월, 그리고 1차에 한하여 3개월 더 연장할 수 있으나 그 당시에는 퇴원 기약이 없는 무기수 신세였습니다. 이런 것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가족에 대한 분노를 풀 길 없는 고참들 중 어떤 환자들은 후배들의 괴롭힘으로 자신을 달래려는 것 같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제 병실의 방장이었습니다.

몇 년 전 방송된 <열혈사제>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그 드라마에는 조직폭력배가 나오고, 중앙아시아 어느 왕국 국왕 경호원 출신인 중국음식점 음식 배달원이 등장합니다. 그는 우리말이 서툴고 어눌합니다. 그런 그는 조폭에게 놀림감이 됩니다.

그 조폭은 외국 노동자 배달원을 만날 때마다 잡아 세우고 “간장 공장 공장장은 강공장이고---” 등을 따라 하라 강요합니다. 당연히 우리 말에 서툰 배달원을 더듬거립니다. 그럴 때마다 그것도 못 한다고 매질합니다.

제가 바로 그런 꼴을 당했습니다. 그 병원에서는 A.A.방식으로 본인의 실명을 숨기고 익명을 사용했습니다. 자신의 출신지에 따라 이름이 붙여집니다. 서울 종로에서 왔으면 종로 김, 대구에서 왔으면 대구 박 등으로 불립니다. 그는 화곡동 출신인지 화곡 조라 불렸습니다.

그는 무료할 때마다 저를 침상에 불려 앉히고 대답을 강요했습니다. “나는 알코올중독자 화곡 조, 또라이다. 내가 누구지? ” “알코올중독자 화곡 조 또라이입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금단 상태에서 병원의 군기의 무서움에 떨고 있던 저는 그 말을 차마 따라 할 수 없었습니다. 감히 절대 권한을 가진 방장을 정신질환자를 비하하는, 욕설에 가까운 또라이라 부르다니. 당시 병원에서는 알코올중독자와 정신질환자를 철저히 구별했습니다. 정신질환 취급은 큰 모욕이었습니다. 정신질환자는 똘, 알코올중독자는 콜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방장을 감히 또라이라고 하라니?

금단 상태였고,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저는 당연히 더듬거리며 그 말을 따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베개로 저의 머리를 후려칩니다. 저는 그 충격에 뒤로 벌렁벌렁 나가떨어집니다. 정신이 온전한 환자들에게 폭력을 감행하면 나중에 후환이 두려워 괴롭히지 못하고, 저는 바보 취급당할 때니 마음 놓고 괴롭힌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환우들은 그 방장이 두려워 아무도 그의 폭행을 제지하지 못했습니다.

유도 고단자들로 구성된 보호사들의 폭력도 간과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환자의 난동을 제압하고, 병실의 질서를 유지하는 등 환자 관리가 주 임무였으며, 반항적인 환자 제압에 그들의 유도 기술을 사용했습니다. 가끔 잘못을 저질러 그들에게 끌려간 환자의 비명이 병실 전체에 울려 퍼지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병실은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원장에게 치료받은 기억은 거의 없습니다. 개별 상담을 전혀 없었고, 1주일에 2~3회 회진이 전부였습니다. 회진 때면 군대 내무반 점호처럼 침상에 줄지어 앉은 환자들에게 원장이 다가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어떻습니까? 괜찮아요?” 환자들의 대답은 모두 똑같습니다. “예, 괜찮습니다.” 어느 누구도 불편하거나 아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정신병원에서 아프다고 하면 안 됩니다. 아프다면 병원이니까 치료한다고 더 잡아놓을 것 같아 죽어도 아프면 안 됩니다. 반대로 그 당시 유행하던 금주기도원에서는 아프지 않아도 아파야 합니다. 병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곳은 치료기관이 아니니까 치료를 위해 외부의 병원으로 외진을 가면 탈출의 기회를 만들 수 있고, 몰래 전화로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구조 요청이라도 할 기회를 노릴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들은 없는 병이라도 만들어야 합니다.

똑같은 날의 반복이었습니다. A.A.의 빅 북의 몇 부분을 암기하고, 술 마시던 지난날의 경험담을 마치 음주 영웅담처럼 늘어놓고. 과제 발표 시간에 인민 재판을 하고, 이렇게 한 달이 지나던 날 큰 사건이 터집니다. 집단 탈출 사건입니다.

이른 아침 기상하고, 조식을 마친 상태였습니다. 갑자기 고참들이 입원한 지 오래되지 않은 우리를 서둘러 한 병실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요란한 발소리와 함께 간호사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전체 환자의 절반가량이 우르르 병실을 빠져나갔습니다. 집단 탈출이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었습니다. 장기 입원에 퇴원은 기약이 없고, 막연한 기다림은 그들에게 희망 고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집단 탈출을 계획합니다.

이른 시간 아직 병원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에 탈출하기로 의견을 모읍니다. 1층 원장이 근무하는 가정의학과도 아직 출근 전입니다. 숙직 근무한 보호사 한 명이 병원을 지키고 있을 겁니다. 2층에 설치된 비상벨을 누르면 숙직 근무한 보호사가 올라올 것이고, 그때 환자들이 힘을 합쳐 보호사를 제압하고, 병실 자물쇠 키를 빼앗아 문을 열고 탈출하기로 모의했습니다.

마침 비상벨을 누르기도 전에 일찍 출근한 간호사가 2층 병실로 올라왔습니다. 힘센 보호사 대신 연약한 간호사는 힘으로 제압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간호사를 밀치고 우르르 몰려 나갔습니다.


탈출 사건으로 병원에도 변화가 왔습니다. 원장이 바뀝니다. 이번에 취임한 원장은 미국에서 알코올중독 치료 교과과정을 이수한 유능한 정신과 전문의가 인수한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확인 길이 없었고, 간판은 여전히 가정의학과 그대로였습니다.

그 원장이 오고도 달라진 것은 별로 없었습니다. 회진 시간이 늘고, 가끔 알코올중독에 관한 특강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저는 그 원장으로부터 치매 판정을 받았습니다. 지능지수가 상당히 높은 편으로 한번 본 것은 쉽게 기억하던 저는 남보다 우수한 두뇌를 갖고 있다고 자부했었습니다. 학생 시절 학업 성적도 항상 상위권이었습니다.

그런 저는 입원 2개월이 지날 때까지 암기문의 두 줄도 암기할 수 없었습니다. 앞의 한 문장을 암기하고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며 곧 암기했던 앞 문장을 잊어버립니다.

원장은 회진 시간에 저와 두 사람을 지목하며, 당신들은 암기하려 노력하지 말고 그 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려 노력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오랜 시간 금단에 시달리며 아내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퇴원 직전까지 아내와 가족을 본 기억은 없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이 동생과 함께 면회를 왔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심한 금단으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저를 보고, 제 아내는 원장과 상담했습니다. 원장은 제가 술로 몸이 너무 많이 상한 상태이니 건강이 회복되면 퇴원시켜 데리고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치매가 되었으니 그냥 데리고 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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