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 치유 길라잡이

제16회 A.A.의 주기도문 Ⅲ - 평온함을 청하는 기도

관리자
2024-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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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변화의 예로 미국 영화 한 편을 소개한다. 한순간의 경이 <그라운드 호크데이>라는 미국 영화 이야기다. 구속(救贖)의 의미가 담긴 영화다.

피츠버그의 방송국의 오만한 일기예보 담당자 필 코너스가 매년 열리는 그라운드 호크 데이 축제에 일기예보를 생중계하기 위해 펜실베이니아주 핑스토니라는 소읍에 파견된 이야기다.

그는 누가 보아도 거드름을 피우며 일기예보를 진행한다. 행사가 끝나자, 지루한 시골이 싫어진 그는 제작팀에게 최대한 빨리 피츠버그로 돌아가자고 다그친다. 그러나 갑자기 쏟아진 폭설이 그들을 붙잡는다. 어쩔 수 없이 핑츠토니에서 하룻밤을 더 지내게 된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일어나 보니 날짜는 다시 2월 2일 그라운드 호크 데이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그날을 다시 한번 산다. 다음날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연일 계속이다. 아침마다 잠에서 깨어보면 다시 2월 2일이다. 모든 장면이 전날과 똑같이 펼쳐진다. 모든 인물도 전날과 똑같이 만난다. 그들의 행동도 전날과 똑같다. 필 코너스는 시간의 쳇바퀴에 갇힌 것이다.

처음에는 그 경험을 마냥 좋아한다. 아는 사람이 없으니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기분 내키는 대로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실험에 들어간다. 술과 섹스의 욕구에 탐닉한다. 그러나 머잖아 쾌락도 싫어지고, 그 하루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영원한 그라운드 호크 데이의 삶은 그대로 그에게 지옥이 된다. 열 번도 넘게 자살을 시도하지만 다음날 깨어보면 여전히 2월 2일이고 상황은 전날과 똑같은 그라운드 호크 데이다.

결국 코너스는 터득한다. 비록 날짜는 바뀌지 않아도 그 하루를 사용해 자신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우친 것이다.

우선 자신의 재능을 계발한다. 피아노 레슨을 받고, 얼음 조각을 익히고, 학교에 다니고, 시를 암송하고, 외국어를 배운다. 모두가 연일 반복되는 하루를 사용해서 한 일이다.

그러다 그는 또 다른 것을 깨닫는다. 자신이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읍내를 돌아다니며 그라운드 호크 데이에 일어난 다른 일들을 접하기 시작한다. 한 남자가 음식을 토하며 죽는다. 한 커플이 약혼을 파혼한다. 한 아이가 나무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진다.

이런 모든 사건은 코너스의 개입으로 전개가 달라진다. 날마다 같은 시간에 그는 같은 장소에 나타나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다.

그렇게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수백 번도 더 구해 준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것을 즐기게 된다. 그는 영원히 하루밖에 없는 그 소읍의 영웅 아니 성인이 된다.

코너스가 살아갈 날은 오직 그 하루뿐이다. 그의 삶은 글자 그대로 한순간에 갇혀 있다. 그 순간이 영원처럼 이어진다. 그러나 그는 그 하루를 잘 사는 법을 배운다.

이 이야기는 결국 어느 날 아침 코너스가 깨어보니 2월 3일이 되어 있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날짜만 바뀐 것이 아니라 코너스도 바뀌어 있었다. 그는 음악가, 조각가, 시인, 의사, 상담자, 돕는 사람, 만인의 친구 등 새사람이 되어 있었다. 모두가 그 하루에 된 일이었다.

이것은 공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의 시간 개념과 우리의 시간 개념은 같지 않다. 무한한 존재인 하나님은 모든 시간이 현재인 양 모든 시간에 다 살아 계신다. 유한한 존재인 우리에게는 현재만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하루하루가 똑같을 수 있다. 날짜와 장소와 달력과 상황이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세상은 정말 하나님이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 사용하시는 그라운드 호크 데이와 같은 곳일 수 있다. 변화된 우리가 다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말이다. 영원이란 시간의 흐름(과거에서 현재로, 다시 미래로)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이 순간 같은 것일 수 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알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지금 이 순간뿐이기 때문이다.

 

알코올중독자라는 사실은 죽어 무덤에 갈 때까지 변함이 없다. 우리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마시다가 비참하게 죽기보다 비록 중독자지만 마시지 않는 알코올중독자로 바꿀 수는 있지 않은가?

 

유명한 톨스토이의 우화가 있다. 제정 러시아 어느 시골에 야심만만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세상을 바꾸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그 꿈은 이루기에 그는 너무 무력했다. 그래서 그 꿈의 범위를 축소했다. 그러면 이 나라만이라도 바꾸어 보자. 그것도 불가능했다. 그는 다시 꿈을 더 축소했다. 그렇다면 이 마을만이라도 바꾸어 보자. 그러나 그것도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가정만이라도 바꾸려고 노력했다. 그마저도 그의 힘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바꿀 수 있는 대상은 자기 자신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기 행동과 생각과 습관부터 바꾸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자기의 가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런 변화는 확산하기 시작했다. 가정이 변하니 이웃이 변하고, 이웃이 변하니 동네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밤새 눈이 쌓인 아침을 맞는다. 그는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자기 집 앞길의 눈을 치운다. 그리고 이웃집 앞길도 깨끗이 쓸어준다. 그러자 이웃도 그의 선행이 감사하고 또 미안했는지 돕기 시작한다. 다시 이웃에 이웃도 동참한다. 이렇게 온 동네가 깨끗해진다.

이렇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남을 우리의 필요에 맞추어 변화시키기보다 더 쉬운 일이 바로 우리가 먼저 변하는 것이다. 마시는 알코올중독자에서 마시지 않는 알코올중독자로의 변화, 이것은 기적이 아니다.

 

그리고 이를 구별하는 지혜도 주소서

알코올중독은 불치병이고, 나는 그런 알코올중독자로서 술을 끊지 못하는 사람이고, 그러니까 마시는 것은 당연하고. 그렇다면 그렇게 마시다 죽을 것인가, 아니면 마시지 않는 알코올중독자도 있으니까 마시는 알코올중독자에서 마시지 않는 알코올중독자로의 변화할 것인가?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것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알코올중독이 깊어지면 우리의 정신도 큰 손상을 입는다. 그리하여 알코올중독의 정신적 증상이 나타난다. 지남력 장애가 온다. 지남력이란 시간, 장소, 인간을 인식하는 기능으로 이 기능이 저하된다.

또 이해력에도 장애가 온다. 어떤 일이 발생해도 그 일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엉뚱한 이야기로 응수하게 된다.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한 말로 대답하니 상대는 이런 사람과 대화를 기피하게 된다. 끝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게 되고 외톨이가 되며, 마침내 고독과 고립이라는 정신적 압박감에 시달리게 된다.

판단력에도 장애가 발생한다. 대뇌피질의 손상으로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없게 되고, 감정에 치우치며 모든 일의 판단에 장애가 발생한다. 판단의 기준이 단순해진다. 가치 판단을 할 때, 자기의 양심이나 사회윤리 도덕 및 법질서 아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정상적인 사람들이다. 그러나 중독자들은 이런 기능이 저하된다. 모든 일을 ’옳다 그르다‘로 판단해야 하나 중독자는 그러하지 못하다. 그들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좋고 싫음‘ 즉, ’쾌 불쾌‘로 사고의 기준을 정한다. 그래서 자신의 음주를 저해하는 사람은 적이고, 자신의 음주를 방임하는 사람은 동지로 인식한다. 어린아이처럼 사고가 단순해지며, 논리조차 단순 논리, 흑백논리로 변한다.

여기에 장기간 곡기를 끊고 대량으로 술을 마신 후유증으로 뇌세포의 파괴로 기억력에도 문제가 발생한다. 심한 경우 알코올성 치매로 악화되기도 한다.

이런 증상을 복합적으로 갖고 있는 알코올중독자들에게 현실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알코올중독자들에게 음주의 위험성을 알려도 그들은 거의 모두가 ’나는 아직 괜찮아요‘가 공통된 반응이다.

인간의 지혜에는 한계가 있다. 그런 인간들 중에 알코올중독자들은 이런 증상까지 갖고 있는 만큼 기도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지혜와 비슷한 말로 지식이 있다.

지식이란 ’어떤 사물에 관한 명료한 의식, 알고 있는 내용‘이라 정의하며 철학적으로는 ’인식에 의해 얻어진 성과, 광의로는 사물에 관한 개개의 단편적인 사실적, 경험적 인식, 엄밀한 뚯으로는 원리적, 통일적으로 조직되어 객관적 타당성을 요구할 수 있는 판단의 세계‘라고 사전은 말한다.

지혜는 사전에서는 슬기로 정의하며, 슬기란 사리를 밝히고 잘 처리하는 능력이라고 풀이한다. 지식은 배워서 익힐 수 있다. 그러나 지혜는 배워서 익히는 것이 아니다. 만고풍상을 겪은 노인들은 지혜의 보고라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들은 배우지 않아 글을 모른 까막눈이라도 유식한 젊은이보다 더 슬기로운 모습을 우리는 발견한다. 그래서 지혜는 배워서 익히는 것이 아니다.

지혜란 사물의 실상을 관찰하여 미혹을 끊고, 정각(正覺)을 얻는 힘으로 정의한다. 학문, 실생활, 정치, 경제 등 거의 모든 부분에 필요한 총명을 일컬으며, 그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임이라 규정하고, 아울러 슬기와 총기를 비슷한 말로 제시한다. 또 지혜를 듣는 심장이라고 말한다. 지식은 배워 머리에 담으나 지혜는 마음 깊은 곳, 즉 심장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왕 중 가장 중 가장 유명한 솔로몬이 1천번 제사를 드리고 그 대가로 구한 것이 지혜였다.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 의인 욥은 지혜를 얻는 방법으로 하나님께 구하여 얻으라고 한다. 막연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해 보자. 우리에게 해결할 수 없는 많은 문제가 있다. 이것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결국 인간의 지혜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은 인간보다 뛰어나신 하나님께 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문제가 생기면 전문가를 찾듯이.

지식은 단순히 어떤 사물에 대한 기술적인 이해력을 말한다. 그러나 지혜는 한 인격이 인생의 존재와 의미 전반에 대립하여 갖는 통찰력 전체를 가리킨다. 따라서 세상의 이론적 지식이 없는 사람도 그 양심과 이성에 따라 우주적 원리를 추구하면 심오한 지혜를 가질 수 있다.

성경은 참된 지혜의 근본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며, 참 지혜이신 그리스도로부터 하늘에서 주신 것이라고 한다.

알코올중독자들은 마시면서 살다가 비참하게 죽을 것인가? 아니면 마시지 않는 알코올중독자로 살 것인가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간절히 구하라고 A.A는 네이버 교수의 기도문을 빌어 권면한다. 타인을 또 환경을 변화시키기에는 애초부터 무력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을 포기하고 나만이라도 변화할 것인가를 구별하는 지혜가 절대 필요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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